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산리 전투 (문단 편집) === 한국 측의 주장 === 그러나 일본 측의 주장 역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첫 번째 근거로 일본군이 자신들의 패배를 축소, 은폐한 사례들이 실존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 말기의 대만 항공전에서도 엄청난 날조 보고를 올린 적이 있다. 다만 일본군이 잘나가던 전쟁 초중반에는 사실대로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과연 당시 상황이 거짓 보고를 해야 할 정도로 심한 상황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청산리 전투가 대첩이었는데 일본이 날조했다는 것이 아니라 게릴라를 상대로 인명피해를 내면서 목표 달성에도 실패한 일본군 입장에서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아 사실대로 서술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상존하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대목이 바로 일본 측 기록인 간도출병사에서도 나타난다. * 첫 번째, 간도출병사에 따르면 일본군은 500명~600명 규모의 기관총을 보유한 무장 조직을 상대로 1개 기병 연대는 퇴로 차단을, 1개 보병 연대는 추격을 맡았으므로 확실한 병력의 우세를 점한 상태였으며 실제로 600명 규모의 숙영지 흔적을 발견함으로써 첩보가 사실이라는 것까지 확인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후 본격적인 추격에 나선 것은 고작 1개 보병 중대 메이지 23년 육군 정원령에 명시된 1개 중대의 정원은 장교와 부사관까지 포함해서 136명이었고 이들은 30분 이상 단독으로 교전한 후에야 연대 주력의 구원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본대와 멀리 떨어진 상태였다. 600명 규모의 무장 조직을 상대로 4:1 이하의 열세에 처한 상태로 교전을 벌였는데 오히려 1대 4의 압도적인 교환비를 보이며 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개 중대가 고립된 상태에서 지리적으로도 열세에 놓이고 수적으로 4배 이상 많은 적에게 기습을 받아 핀치에 몰려 있었으나 용전분투하여 오히려 4대 1의 유리한 교환비로 교전을 마무리했다는 것인데, 정규군과 게릴라의 질적 차이를 감안해도 과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반론으로 제기한 예시들은 모두 정규군이 기습의 묘를 살려 들이치거나 높은 훈련도나 병종의 이점을 살려 자유롭게 기동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거꾸로 정규군 쪽인 일본군이 기습당하고 병종의 이점도 없었으며 높은 훈련도를 살려 빠르게 기동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그것이 똑같이 일어날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예시로 든 전투들과 같은 전쟁인 왜란과 호란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투에서 비정규군인 의병들이 숫적 / 지리적 / 전술적으로 모두 우세한 상황에서도 항상 모랄빵을 터트리며 달아나기 바빴는가? * 두번째, 일본 측은 야스쿠니 신사에 기록된 인원과 후생성 자료, 제19사단 사령부 보고서의 내용이 일치한다는 것을 근거로 들지만애초에 앞의 두 자료는 2차 사료에 가깝다. 제19사단 사령부 보고서를 바탕으로 전몰자를 봉안한 것이 야스쿠니 신사고 같은 보고서를 채택하여 연금 수혜자를 결정한 것이 후생성의 자료다. 서로를 참고한 자료들이 같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지, 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신빙성이 늘어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또 야스쿠니 신사가 모든 전몰자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전후에도 살아 있던 사람이 야스쿠니 신사의 명부에 오른 경우가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http://news.kbs.co.kr/news/view.do?ref=A&ncd=2952521|#]] 야스쿠니 신사가 자체적인 조사단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럼 대체 무엇을 근거로 집계했길래 이런 말도 안 되는 오류가 있는 것인가? 청산리 전투의 전사자에 관한 한국 측 주장을 정리하면 첫째, 현대로 올수록 한국 측 자료의 추정치 역시 납득 가능한 선에서 모이고 있고 둘째, 이 정도의 인명 피해라면 재편성을 위한 인사 명령까지는 갈 필요가 없으며 셋째, 일본 측 사료를 전적으로 따른다 하더라도 세부적인 기록에서 믿기 어려운 부분이 많고 넷째, 후생성 자료와 야스쿠니 신사, 제19사단 사령부 보고서는 서로를 바탕으로 작정된 것이므로 상호 간의 일치가 신뢰성의 근거로 작용할 수 없고 다섯째, 야스쿠니 신사의 전몰자 기록이 정확하지 않으니 일본 측이 주장하는 손실비가 사실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도표에서도 전술적으로는 승리했지만 전략적으로는 실패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2018년 9월자 기사에 따르면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 위원은 계간지 '역사 비평' 최신호에 기고한 '보고에서 석고화한 기억으로 - 청산리 전역 보고의 정치학'이라는 글에서 청산리 전투의 실체는 다분히 불투명하다고 지적했다. 다만 당시 독립군의 상황과 전장환경 속에서 특수한 환경임을 감안했을 시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청산리 전투의 실상과 의의와 달리 근본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전과 논쟁에 매몰된다면 본질이 변질할 수 있다고 보론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10325170|'청산리 전투 기록, 과대 평가 가능성 고려해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